캄보디아 - 킬링필드의 악몽과 앙코르 와트의 신비가 공존하는 곳
캄보디아 하면 앙코르 왓과 킬링필드가 생각나는 나라이다. 1984년 킬링필드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저게 정말일까?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일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 오른다.
The Killing Fields 와 안젤리나 졸리를 통해 알게된 영화 툼레이더(Tomb Raider)의
으시시한 배경이 바로 앙코르와트란
사실을 알게 된후로 언젠가 시간나는대로 캄보디아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캄보디아가 킬링필드라는 내전이후에 지뢰문제, 빈곤문제, 장애인 문제, 아동 매매춘,
만연한 에이즈 감염자 수 및 확산 등 긍정적인 부분 보다는 부정적이고 면이 많은 나라였음
캄보디아 국기
국기는 파란색 줄 가운데 빨간색이 있는데 가운데 에는 앙코르와트 문양이 있다. 캄보디아 인들이
앙코르와트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수도
프놈펜 - Phnom Penh
프놈펜은 캄보디아의 수도 이다. 메콩 강(Mekong River)과 톤레삽 강(Tonle Sap River) 네 갈래가 교차되는 큰 강줄기 서편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는데
캄보디아 에서는 이를 "챠토묵(Chattomukh-"Four Face"를 의미)이라고 부른다.
이 강줄기는 프놈펜 동남쪽에서 다시 메콩강과 바삭 강(Basak River) 으로 분리되어
흐르는데 남동쪽 방향으로 흘러 베트남 호치민시 남쪽을 관통하여 남지나 해 (the South China Sea)로 흘러 들어간다.
메콩강은 중국의 서 북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남 베트남의 메콩 델타 삼각주 까지 흐르는 세계에서 열 두번째로 긴 강이다.
매년 가을쯤이면 몬순 비(monsoon rain)가 내려 너무나 많은 비의 양이 메콩강으로 유입되어 캄보디아의 광범위한 지역에 홍수를 일으킨다.이 홍수로 인해 톤레삽 강은
역류 되어 다시 북부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인
톤레삽 호수(the Tonle le Sap-"Great Lake")로 유입 된다.
이 강물의 유입으로 톤레삽 호수는 평소 크기 보다 10배 정도 호수의 크기가 늘어나게 된다.
만약 캄보디아를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캄보디아엔 즐길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너무 가난해서...킬링 필드의 역사 때문에...!! 실제 킬링필드의 현장을 방문한 뒤에는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얼마 전만 해도 인구 700만명중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200만명이나 되는 나라에 와서
무엇을 즐기고..웃고 떠든단 말인가?
아직도 그때의 처참한 상처와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에서!
하지만 의미있는 여행을 원한다면 우선 비디오가게에서 1984년 만들어진
영화 'The Killing Fields"라는
영화를 먼저 보고 캄보디아 땅을 밟으라고 권하고 싶다.
최근에 킬링 필드의 원저자가 지난 3월 30일 미국 뉴저지의 병원에서
췌장암으로 3개월간 투병하다가
타계 했다는는 소식이 알려졌지만 킬링필드는 실제 캄보디아 기자 -"디프란"이
미국에 망명한후 탈출 전에
캄보디아 킬링 필드의 현장에서 체험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 캄보디아에 가서
실제 스토리와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촬영한 실화 영화이다.
아울러 안젤리나 졸리의 "툼 레이더"를 볼 것을 권한다.
앙코르 와트에 가면 영화속 신비한 무덤의 촬영 장소와
영화 주 배경이 어디서 유래 하는지 알게 되면 각 장소 마다 좀 더 실감이 날 것 같다.
안젤리나 졸리가 캄보디아에서 영화 촬영을 배경으로 캄보디아와 인연을 맺어 그녀의 입양아들도
캄보디아 애들을 선택해서 키우고 있는데 캄보디아에 가보면 그 심정을 이해 할수 있을것 같다.
나는 이미 그 비참한 영화와 툼 레이더를 다 본 경험이 있는지라 캄보디아에 관한 상식만 알면
여행시 좀더 쉽게 이해할수 있겠다고 생각 하고 약간의 공부를 한뒤 캄보디아를 여행 했다.
아래에 캄보디아에 관해 정리해놓은 위키피디아의 자료를 참고 자료로
우선 읽어 보았으면 한다.
우리나라도 6.25를 경험한바 있으나 이제는 체험 세대들은 점차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얼마남지
않은 상황이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당시 폴포트가 적극적으로 활용한
크메르 루즈의 핵심 병사들은 바로 농촌의 어린 소년들이거나 젊은 청년들 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6.25때 배고프고 무지한 북한 농촌 청소년들한테 완장을 채워주고 만행을
저질렀던 것과 일맥 상통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철저하게 북한의 침략당시 공산당의 전술,전략을 모방하여 폴포트가 크메르 루즈를 만들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들에게 완장하나 채워주고 공산 쿠데타 수뇌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하였는데 판단력이 미숙한 청소년들을 이용하여
사람을 잡아들이게 하고,부자나 언론,선생,지식인,공무원,경찰들 기득권 세력을 붙잡아
친미 정권시대에 부역한 인물로 규정하고 무차별 숙청 및 잔인한 살해 행위를 자행했다고 하는데
킬링필드의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현장에서 이러한 만행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과
죽은 유골들로 이를 증명하고저 현 정부가 이를 고발하고 전세계에 알리고 있다.
막상 보존해 놓은 현장을 방문하면 인간으로서 어찌 저럴수 있는가 하는 잔혹감에 치를 떨게되고, 불쌍하게 죽어간 죄없는 영혼들로 인해 숙연함과 비통함 마저 느낀다.
과거 6.25를 경험한 우리 나라 사람들로서는 다시한번 그때의 비슷했던 상황을 떠올리며,남의 일이 아니라는 오싹한 느낌 마저 들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캄보디아와 한국과의 관계
우리나라와는 1962년 7월 총영사관을 개설하였고 2년 3개월 뒤
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나 북한 권투선수 망명거부사건으로 주프놈펜 총영사관을 폐쇄하였다.
캄보디아는 북한과 매우 친한 나라이다.왕이 내전으로 피신했을때 피신처가 바로 북한 이었을 정도로 친북 국가이다.
캄보디아는 베트남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효과적인 베트남 공략을 위해 바로 옆에 인접한 왕정 국가인 캄보디아에 친미 위성정권을 수립하였는데,
캄보디아 군부의 론놀 장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미국은 이곳을 이용하여 베트남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친미 론놀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라나라와 양국은 1970년 8월 5일 수교합의 하였다.
그러나 론놀의 군부가 부패하고 국민을 수탈하여 어려움이 더욱 심해지자
이틈을 이용하여 1975년 4월
폴 포트의 공산당 크메르 루주(붉은 군대)가 킬링 필드를 일으키며 수도 프놈펜을 장악하자
우리나라는 단교 하였었다.
1992년 2월 양국간 첫 외교 관계 접촉이 프놈펜에서 이루어진 후 1997년 10월 수교 합의문에
서명하였다.
그이후 우리나라와 캄보디아는 자유로운 왕래를 할수 있게 되었다.
간단하게 알아본 캄보디아 역사
1431년 크메르제국은 시암,즉 타이의 공격을 받고 수도 앙코르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프놈 펜으로 수도를 옮겼다.
19세기 중후반기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860년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가 우연히 숲 속에 버려진 거대한 불교사원을 발견했다.
1953년에 프랑스로부터 완전 독립을 달성하였다. 국명은 캄보디아 왕국이였다.
1970년 론놀의 친미 쿠테타로 인해 캄보디아왕국은 무너지고 캄보디아 공화국이 되었다.
1975년 공산군이 정권을 잡은후 민주 캄푸치아로 바뀌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7명 중 1명 이상이 죽은, 당시 200만 명 가까이 죽었다. 1979년~89년 베트남이 침공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라는 허수아비 정권을 세웠다.
1989년~93년 베트남군이 철수한 후 캄보디아국으로 되었다. 1993년~현재 유엔의 감시 아래 치러진 선거로 다시 캄보디아 왕국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른 내전은 1980년대 말까지 내전이 계속되었으며, 당시 중립국이던 캄보디아가
북베트남을 지원할까 염려한 미국의 폭격과 친미정권의 공산주의자
학살(제1차 킬링필드), 그에 이은 원리주의 성격의 공산주의자였던
크메르루주(지도자 샐로스 사르)에 의한
반대파 학살(제2차 킬링필드)은 지금도
이 나라 국민들에게는 마음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고 한다.
1992년부터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1993년에는 지금의 입헌 군주국으로 되돌아왔다.
(캄보디아 역사는 위키피디아 자료 인용함)
1953년 11월~1970년 10월
실질적으로 캄보디아의 독립이 보장된 것은 19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지나에 관한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반프랑스 저항 조직이 무장해제되면서 부터였다.
이제 캄보디아는 시아누크가 지배하는 독립된 국가가 된 것이다. 그는 국왕보다는 수상이 되는 것이
캄보디아를 장악하는 데 보다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1955년 3월 자신의 아버지인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모든 세력을 인민사회주의연합인 상쿰(Sangkum)으로 규합하면서 수상이 되었다.
당시 상쿰과 대립관계에 있던 정당은 우파인 민주당과 좌파인 인민당이 있었으나,
시아누크는 세력관계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자신의 지배체제를 유지하였다.
한편 시아누크는 외교의 측면에서 중립체제를 선언하고, 동양과 서양 가운데 어느 한 곳으로 경도되는 것을 경계했다.
이것은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시아누크가 이러한 전략을 추구했던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좌파와 우파의 활동이 본격화되고, 인접국인 월남에서 정치적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캄보디아는 1963년 11월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거부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무역ㆍ은행ㆍ보험을 국영화하고,
1965년 5월에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캄보디아 내에서 좌파에 대한 탄압은 1962년 1월 캄보디아 인민당 간부의 체포로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 10월~1975년
월남전이 절정에 달하자 시아누크는 대미복교에 나섰다.
그리 마침내 1969년 6월 미국과 국교를 재개했다.
당시의 상황은 1966년 론놀이 등장한 이래, 우파의 권력장악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1969년부터 론놀은 종래의 국영화 정책을 수정하고 경제의 자유화를 표방하였다.
공산화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 1970년 당시 수상이던 론놀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시아누크는 축출되었고, 캄보디아에는 반공정권이 들어섰다.
1970년 3월 18일 시아누크가 소련을 방문하고 있는 사이에 우파였던 론놀수상,
시릭마탁 부수상 등이 무혈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이것은 구체제의 종말과 내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다.
론놀에 의해 축출된 시아누크는 주로 중국에 머물렀으며, 북한에 있기도 했다.
그래서 페놈펜에는 이를 기념하여 모택동(마우쩌둥)거리와 김일성 대원수 거리가 있는데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시아누크 국왕을 따뜻하게 맞이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고 한다.
또한 뒤에 살펴볼 폴포트도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을 만큼, 북한과 캄보디아는 무언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1975년 4월~1979년 1월
론놀정권과 상반된 입장을 견지한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루즈가 캄보디아를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의 평화는 정착되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 식민지 하에서 독립한 이후 강화돤 베트남에 대한 적대성 때문이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시아누크가 지배하던 시절부터 베트남과 태국을 정치적 침략자로 간주했는데
베트남에 대한 적대성이 더욱 강해졌다. 이 입장은 우익 정권인 론놀이 집권하던 시기에도,
좌익 정권인 크메르루즈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인도지나에서 베트남이 통일되고
캄보디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경향은 더욱 강해졌던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크메르루즈는 1976년 1월 신 헌법을 공포하고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바꾸었으며, 인민대표회의에서 누옹체아를 의장으로,
키우삼판을 국가 간부 회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당시 크메르 루즈는 완전히 중공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중공은 폴포트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조종했고,
시아누크 국왕을 북경에 연금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폴포트는 공산 정권을 세웠으며,
전후 4년이 되지 않는 기간에 인구가 700만 명인 작은 국가에서 200여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살해된 200여만 명 중에는 약 3만 명의 베트남인들과 약 20만 명의 화교들이 포함됐습니다.
당시 화교들은 도피하면서 캄보디아 주재 중국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영사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캄보디아는 도살장이 되었고, 곳곳이 무덤이었으며,
시체가 산을 이루었습니다-캄보디아 쑤밍교수 정치평론가)
1979년 1월~1981년
1979년 1월 7일 프놈펜을 점령한 ‘구국전선’은 ‘캄푸치아 인민 혁명 평의회’를 수립하였다.
의장에는 헹삼린, 국방 담당 부의장에 펜소반, 외무 담당 부의장에 훈센이 각각 취임했으며,
국가명은 캄푸치아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Kampuchea)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 이었다.
이 중 헹삼린은 당 동부지구 위원 겸 제4단장이었는데,
베트남 괴뢰 정권에 발탁되어 1975년까지 크메르 루즈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헹삼린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베트남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폴포트 정권 취했던
극단적인 폐쇄주의, 그리고 수백만의 양민학살의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국민들의 마음이
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은 20개 사단(약 16만 명)을 캄푸치아에 주둔시킴으로써 폴포트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
1979년 2월에는 팜반동 수상과 반티엔둥 국군 참모총장이 프놈펜에서
평화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3월에는 라오스의 수파누봉 대통령과 베트남이 위와 동일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베트남을 맹주로 하는 인도지나 3국간의 특수 관계가 형성되었다.
'해외·여행 > 캄보디아(앙코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앙코르왓트 (2) (2009.7.31~8.4) (0) | 2011.07.07 |
---|---|
앙코르왓트 (1) (2009.7.31~8.4) (0) | 2011.07.07 |
프놈바켐(2009.7.31~8.4) (0) | 2011.07.07 |
압살라 민속춤 (2009.7.31~8.4) (0) | 2011.07.07 |
씨엠립공항/씨엠립 Pacific Hotel (2009. 8) (0) | 2011.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