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야유회·행사/단체여행(1박2일)

수덕사(수덕여관) 단체 가족 야유회

에버그린77 2013. 6. 2. 23:07

 

 

4월 21일 협의회 가족 단체 야유회를 수덕사와 해미읍성을 다녀오기 위해서 현지 답사를 왔었는데,

드디어 6월 1일 날씨는 무더웠지만 즐겁고 유익한 야유회를 다녀왔습니다.

  

 

■ 수덕사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번지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의 탐물은 하루 아침

이슬과 같다네.

 

자경문에 나오는 '三日修心(삼일수심)은 千載寶(천재보)요, 百年貪物(백년탐물)은 一朝塵(일조진)'.

'3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이고, 백년을 탐하여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먼지가 된다'는 뜻이다.

 

불교의 동자승이 공부하는 '자경문'에 나오는 말로 결국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로,

참된 자아와 행복을 찾으려면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없애야 함을 이르는 말이라 한다.

 

 

 

'성지종찰수덕사(禪之宗刹修德寺)'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 圓潭 진성 眞性(1926 ~ )스님이 쓴 글씨이다.

현재 이 편액은 황화정루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수덕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수덕사 삼층석탑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1983년 9월29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입니다.

석탑은 수덕사 승가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조인정사 앞에 있으며 높이는 4m입니다

 

 

 

 

 

 

 

 

 

 

 

관음보살과 관음바위  

이곳은 소원을 빌며 동전을 바위에 붙이면 신기하게도 동전이 바위에 붙은다고하며,

실제로 바위에 많은 동전이 붙어있습니다.

 

 

 

 

 

 

 

 

 

 

 

 

 

 

 

수덕사 7층 석탑

 

 

 

■ 수덕사에 대한 전설

 

 

 

첫 번째: 덕산 향토지에 실려있는 내용

 

홍주 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휼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리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상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두 번째: 백련당 뒷편에 있는 바위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상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 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 수덕여관

 

그곳에는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얽힌 가슴아픈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 이응로 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고암 이응로화백의 미망인 박귀옥 여사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듯 합니다. 

 

지금은 여관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저 대문을 들어가 볼 수가 없어서 아쉽기만 합니다.

 

 

 

 

수덕여관 대문은 잠겨 있어서 지금은 통행을 할 수가 없네요....

수덕여관 대문에서 왼쪽편으로 돌아서 안채를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이 쓰시던 방입니다.

 

 

 

 

수덕여관을 둘러 싼 세 여자, 세 남자 이야기

                                                                                           - 김승웅 글방에서 -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 이응로 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두 폐미니스트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여성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 자식을 대하 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 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 날 같은 희망으로 살아 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신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 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로써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여섯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수덕사와 수덕 여관을 두루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주차장 근처 서울식당에서

산채더덕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1상에 4인 기준, 계속해서 나오는 반찬에 행복한 밥상이었다.

 

 

위 밥상은 사진을 찍고서도 된장국과 두 세가지 반찬이 더 나왔네요....

가격은 1인 12,000원 입니다.